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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에 가고 싶다

바라만 봐도 황홀한 동양최대의 황금사원 수국사.

은평구로 이사를 와서 집주변 지리도 익힐 겸 이리저리 다닐 예정인데 주변에 황금으로 지은 절이 있다기에 인테넷에 수국사를 검색해 봤더니 수국사는 의외로 내가 사는 곳과 가까운 곳에 있더군요.
걸어서 충분히 갈수 있는 곳에요.
우리집 가까이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오후 늦게 재래시장도 익힐 겸 거리를 나섰습니다. 
집을 나서 구산사거리에서 서오릉쪽으로 가다보니 선정여고입구 건너편에 수국사를 가르키는 작은 팻말이 보이더군요.


대로변에서 500M정도 걸어들가니 사찰입구 녹음사이로 말로만 듣던 황금사원이 보입니다.
저녁시간이라 황금사찰은 석양을 등에 지고 있어 찬란한 황금빛을 토해내고 있더군요.

수국사는 대웅전이 황금사찰입니다.
수국사 대웅전은 108평 규모의 법당이 황금사원이며, 99.9% 순금으로 도금되어 있습니다.
가까운 일본에도 황금사원인 금각사가 있지만 25평 규모에 불과해, 수국사야 말로 "동양 최대의 황금사원"이라고 합니다.


수국사는 사찰외부만 황금칠이 되어있는 것이 아니라 법당 내부 및 마루까지 황금으로 되어있다길래 내부를 들여다 봤습니다.
기둥도 바닥도 모두 황금칠로 되어있어 열어둔 문으로 들어오는 햇살에 더욱더 황금빛을 토해 냅니다.

화려함에 반해 법당안으로 들어가 구경하고 싶었지만 법당내부에서 불공드리는 사람들의 방해를 드릴 것 같아 차마 내부로 들어가는 것을 포기하고 열린 문사이로 살알짝 내부 몇컷 담았습니다.

황금바닥을 발로 딛고 싶었지만 불공드리는 분들에게 방해를 드리고 싶지않아 황금사찰인 대웅전을 돌아 봤습니다.
수국사는 제7대 세조대왕5년(1459년)에 세조의 장남 의경세자의 극락왕생을 위해 경릉동쪽에 정인사라는 이름으로 건립되었다고 합니다.
그 후 정인사는 연산군 10년(1504년) 화재로 소실되어 오랫동안 폐허로 남아있다가 이후 몇 번의 중수를 거쳐 광무 4년(1900년) 고종의 내탕금(內帑金)으로 현재의 위치인 갈현동 태화산(太華山) 자락에 다시 짓게 되었답니다.

김수온(金守溫)이 찬한 고양정인사중창기(高陽正因寺重創記)에 의하면 처음 절을 지은 이는 판화엄대선사(判華嚴大禪師)인 설준(雪峻)스님으로 법당등 모든 설계를 도맡아 했다고 하며,
성종2년(1471년) 덕종의 부인이 되는 인수대비가 “이 절을 처음 지을 때 급히 지어 재목이 좋지 못하고 쓰임새가 정밀하지 못하다”하여 판내시부사 이효지에게 명하여 중창하게 하였다고 한다.
이해 2월에 불사를 착공하여 10월에 낙성하였는데 이듬해 4월 초파일에 낙성법회를 성대하게 베푸니 인근의 승려 수만여명이 절하면서 일찍이 없던 일임을 감탄하였다고 한다.
새로 중창한 절의 규모는 총 119칸으로 단청이 아름다워 봉선사(奉先寺)와 쌍벽을 이루었다고 한다.
이후 수국사는 덕종, 예종의 원찰로서 오랫동안 왕실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아왔다.
이는 “성종실록” 22년 10월 27일자 기사에 “호조에 전교하여 정인사에 봉선사의 예에 의하여 쌀 30섬과 면포, 정포 각각 50필을 하사하게 하였다”라는 기록등 왕조실록에서 확인할 수 있다.
“연산군 일기” 10년 9월 24일자 기사에는 정인사에 실수로 화재가 발생하니 “능침(陵寢)에 가까운 절이라 하여 즉시 경기감사 안윤덕과 형조참판 박열을 불러 금표로부터 바로 가서 국문하게 하고 놀란 영혼들을 위해 위안제를 지내도록 하라”는 기록도 보인다. -수국사 홈피에서-

이전까지 왕실의 원찰로 알려져 있던 수국사가 원래부터 황금 절이었던 것은 아니랍니다.
1992년 한자용 스님이 회주로 부임하면서 수국사 중흥을 내걸고 지금의 황금 절로 탈바꿈됐는데, 처음에는 주위의 반대나 우려도 많았다고 합니다.
아마, 요즘처럼 경제가 어려울때 황금사원을 바라라 보니 도대체 "법당 전체가 금칠을 했으니 금칠을 하는데 엄청난 황금이 들어갔을 것인데, 금값은 얼마나 들었을까?"라는 생각과 함께 "사찰에 이렇게 많은 돈을 들어 굳이 황금으로 도배를 한 이유가 궁금해지기도 했구요."
황금은 부귀와 사치의 상징이라 1992년에도 서민들의 부정적인 시선이 아마 따갑게 쏟아졌겠지요.
수국사를 돌다보니 뒷문입구에 한자용 스님이 한국불교문예신문을 통해 황금절을 만든 동기에 대해서 설명한 내용이 크게 붙어 있는데, 법당은 넓은 의미의 부처이기 때문에 부처님께 금 옷을 입혀 드린다는 뜻에서 법당을 순금으로 만들게 됐다고 설명돼 있습니다. 
또한, 황금은 사악한 기운을 막아주고 지혜를 상징하며, 변하지 않는 믿음을 상징한다는 것을 벽보에서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동양 최대의 황금사찰인 수국사, 황금으로 통째로 만든건 아니고 도금입니다만, 번쩍번쩍한게 상당히 멋스럽습니다.
수국사는 동양 최대의 황금사원으로 유명하지만, 목탁새로도 유명하더군요.
절을 찾은 날은 안타깝게도 목탁새를 구경할 수 없었지만, 사연은 이렇습니다.
지난 1984년 4월에 목탁새 한 쌍이 대형목탁에 둥지를 튼 뒤, 매년 초여름이면 찾아와 대 여섯 마리의 새끼를 낳아 방문객들의 사랑을 받았다고 합니다.


이외에도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성취여래불(승리여래불)이 안찰 돼 있고, 우리나라에서는 두 번째로 오비구동상과 초전법륜상이 만들어진 곳이 수국사랍니다.
초전법륜은 석가모니 부처가 붓다가야의 보리수 아래에서 도를 통하고 녹야원에서 최초로 법을 설하는 모습으로 처음으로 진리의 수레바퀴를 돌린다는 의미를 담아 만들어졌으며, 오비구성상은 부처의 초전법륜에서 깨달음을 얻고 최초의 비구가 된 아야교진여, 아습비, 마하나마, 바제, 바부 존자등 다섯 스님의 모습을 형상화했다고 합니다.

수국사의 역사는 15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1471년 성종의 모후인 인수대비 한씨가 절을 창건한 뒤, 1721년 서오릉에 있는 숙종과 인현왕후를 모신 명릉의 능찰이 되면서 수국사로 불리게 됐답니다.
이후 북한산성 총섭인 월초화상이 태자의 병을 치유하면서 고종으로부터 거금을 하사 받아 증창하게 되었으며, 경내 뒷문 쪽에는 연못이 있어 거북이가 헤엄치는 모습을 볼 수 있고, 법당 왼쪽으로는 300m 지하에서 퍼 올린 약수를 마실 수도 있다고 하는데, 지금은 대웅전 입구에 작은 연못이 있습니다.

황금사찰대웅전 아래에는 커다란 미륵불이 있는데, 미륵불아래 가천막이 있어 정면에서 미륵불을 담기에는 힘들어서 대웅전에서 뒷모습을 담았습니다.

초여름, 이 곳 수국사에도 눈부시게 만드는 황금빛 금계국이 지천에 피어서 황금빛주단을 깔아 황금법당 수국사 대웅전이 더 아름답습니다.

그리고, 대웅전 아래 보리도 황금빛입니다.

간간이 보이는 달맞이꽃무리도 황금빛으로 물들었구요.
 
수국사의 황금보전 법당은 외9포, 내15포, 108평 규모에 청기와로 된 전통목조법당이며 법당 안밖을 기와 이외에는 100% 순금으로 개금불사하여 장엄한 도량이며, 지장전을 비롯하여 아미타후불탱화 등 많은 문화재를 보유하고 있는 사찰입니다

해질무렵, 산책길에서 만난 황금사찰 수국사.
이렇게 아름다운 사찰이 내가 사는 곳, 가까이 있다는 자체만으로 즐거웠고, 요즘처럼 경제가 어려워 금을 도배를 한 사찰을 보면서 많은 생각이 들더군요.
허지만 그저, 바라만 봐도 황홀하고 멋진 사찰임에는 틀림없습니다.

수국사, 찾아기도 그리 힘들지 않습니다.
6호선 구산역에서 내려 서오릉쪽으로 가다보면 수국사가 있습니다.
지금 수국사는 황금사찰도 멋지지만 지천에 핀 금계국과 어울려 황금빛이 가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