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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F의 쓰라린 아픔, 제일은행 박석태를 아세요.

매스컴마다 오늘이 I.M.F외환위기 1주년이라고 그 당시 상황을 앞 다투어 내 보내고 있습니다.
I.M.F외환위기를 정부가 발표한 날은 1997년 11월 21일이였지만 , 한보철강 부도가 시작 되면서 이미 회환위기는 진행되었지요.
한보철강 부도가 시작되면서 진로, 대농, 기아, 한라들 재벌 그룹은 잇따라 무너졌고 열심히 사는 서민들에게는 잘 다니는 회사가 부도나면서 실직자가 되어야 하는 아픔을 겪어야 했지요.

한보사건이 터지자, 청문회는 시작되었고, 그 당시 국민들의 이목을 집중시키면서 또 다른 인기프로가 탄생되었지요.

I.M.F라는 단어만 나오면 저의 집안은 몸서리치는 과거가 있습니다.
청문회때 "제일은행 상무이사 박석태 자살사건을 기억하시는지요"
박석태씨는 저의 고모부되시는데, 청문회가 생방송 되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는데 오후 4시경 고모부가 자살했다는 전화를 받고 저는 발자욱도 뛸수가 없더군요.

전화를 받고 망원동자택을 찾아 갔을때, 온 집안은 각방송국카메라와 언론사기자로 에어싸고 있더군요.
온 집안은 슬픔에 잠겨 어쩔줄을 모르는데, 언론사는 대서필필인냥 집안식구들 취재할려고 난리였을때 나의 임무는 메스컴기자들 따돌리는 엄무였습니다.

그 당시 저의 신랑도 지방에서 형제끼리 운영하는 자그마한 사업체에 근무했었고, 서울에는 조그마한 건물이 있어 월세도 나오는 덕에 우리가족은 별 욕심없이 평온하게 살고있었습니다.
사업을 하다보면 늘, 운영자금으로 허덕이여서 이따금 고무부께 은행대출요청을 몇번 한적이 있을때마다 고모부는 "절대로 욕심부리면 망한다.. 은행도 담보가 튼튼하지 않으면 아무리 친한 마무라가 부탁해도 빌려주지 않는 곳이 은행이란다"하시며 조언도 아끼지 않으시던 분이셨습니다.

체격도 자그마하시고 말수가 작으시면서, 친척들의 무리한 부탁은 절대로 들어주시지 않는 아주 강직한 분이셨는데 평상시 저의 가족을 끔찍히도 이뻐하셨거든요.
"욕심내지 않고 열심히 사는 니네들이 참 이쁘다"하셨는데..

"아버님, 어머님 죄송합니다. 기영엄마 미안하오. 기영아. 소영아. 은영아. 수영아. 송주야 미안하다. 아빠는 약했지만 너희는 굳세게 살아다오. 제일은행 임직원 여러분 대단히 죄송합니다. 윤진식비서관님, 박태영의원님, 김원길의원님, 죄송합니다. 여보, 화장해 주시오. (한강으로) 이철수행장님, 신광식행장님 죄송합니다.

               --1997. 4. 못난 아빠 못난 남편 불효자." --

박석태고모부는 이렇게 짧은 한마디의 유서를 남긴채 가족품을 떠나시고 말았습니다.
그 이후 나는 청문회중계방송을 보지 않습니다.

 서울상대를 졸업하고 66년 제일은행에 입행, 지점장 심사부장을 거쳐 이철수행장 때인 94년 이사가 됐으나 한보철강사건의 문책인사로 3월주총에서 자리를 물러나 있었을때였습니다.
 은행을 그만둔 뒤 상당한 우울증 증세를 보여왔으며 자택에서 칩거해 왔는데 청문회 증언 이후 상당한 심리적 갈등을 겪고 있었던 것 같았다는데 가족들 기 죽을까 당신의 고민은 겉으로 내색 한번 하시 않으시는 분이셨습니다.
 제일은행 근무시절 꼼꼼한 성격에 성실한 업무태도로 해서 은행내에서 상당히 신망이 높았던 인물이었다고 신문들은 소개했을 정도였으니까요..

처신도 비교적 좋아 자신이 살고 있는 망원동 단독주택이 80년대 말 수재를 입었을 때 북한에서 보낸 구호미를 받을 만큼 '가난한 은행원'으로 소문이 나기도 해서 고모는 늘 불만이였지만 자식 4남매는 똑똑하고 성실해서 고모님께서 자살 할 당시 둘째딸은 사법연수원에 있었고, 첫 딸은 이화여대를 수석으로 졸업하여 대 기업 연구실에 근무하여 친척들의 부러움의 대상이였는데...
 
청문회에서 신랄한 심문을 받았는데 "제일은행 임직원들에게 대단히 죄송하고 국민들에게 누를 끼쳐서 어떤 때는 죽고 싶은 생각이 들 때도 있다"고 말했다고 그 당시 조문 오신 은행원들의 안타까운 털어 놓으셨는데..

사건의 주인공 박석태가 자신의 자살을 통해 사회에 전달하려 했던 메시지는 무엇이었을까.
물론 그는 어떤 항의의 목적으로 혹은 부정과 비리에 대한 피할 수 없는 책임감으로 자살의 길을 택한 것으로는 보기 힘들었겠지요.

자살하기 며칠전, 청문회에서 모 의원이 "솔직히 털어 놓지 않으면 당신은, 사법연수원에 있는 둘째딸 앞에서 증인으로 법정에 설 것이다"라는 말이 가장 가슴 아프다는 말씀을 하시더군요..

그가 남긴 유일한 단서는 '약한 아버지였다'는 것과 자신이 입에 올렸던 국회의원, 전임 은행장들에 대해 '죄송하다'는 말이었다. 분하고 원통한 것이 아니라 죄책감이였습니다.

그 당시 세간에서 "진짜 자살해야 할 사람"으로 지탄받는 사람들에게까지도 미안하다고 한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신문은 비리로 뒤엉킨 사회가 그를 죽였다고 말했지만 그를 죽음으로 몰고 간 것은 증언석에 나와 피의자의 입장에 섰던 증인들이 아닐까요.
 
그는 특위위원들의 압박에서 박경식과 같은 '거침없는' 소신도 갖지 못했으며 그렇다고 부인 일변도나 답변거부로 일관한 '피의자 쪽' 증인들처럼 배짱도 없었습니다.
보다 기 막혔던 것은 31년 직장까지 날린 이 사건에서 '사회적 피고'로 몰리면서 자기변명 한 번 제대로 못한 피압박의 상태였을 것일겁니다.


I.M.F외환위기를 지나온 10년..
오늘도 삼성 비자금사건, B.B.K사건으로 온 세상은 시끄럽습니다.
잘못한 사람은 한 사람도 없고 정치인, 경제인, 정부정부요인들마저 책임있는 말은 하지 않고 국민들은 불안합니다.


자기 목숨까지 버려 가면서 진실을 말하려 노력했던 사람이 스스로 목숨을 끊게 되는 이런 모순은 절대로 되풀이 되지 않고 정직한 사람들이 살기 좋은 세상, 밝은 사회가 되었으면 하는 바램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