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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십자 봉사

죽은 딸이 남긴 내 손주, 잘 키우고 싶었는데..

지난 목요일 지역행사가 있어 외출했다가 집에 막 도착하여 옷 갈아 입는데 전화벨이 울려 받았더니 이웃에 사는 할머니였습니다.
"답답해서 터질 것 같은데 어디에 하소연할 때는 없고.. 회장님께 하소연이라도 하고 싶은데... 방문해도 될까요."
"그럼요, 저도 이제 막 들어왔어요."
평소에 말이 없는 분이라 "얼마나 답답했으면 전화를 했을까"하는 마음에 아침부터 외출해서 피곤해 쉬고 싶었지만 기꺼히 집으로 오시라고 했습니다.
전화를 끊고 얼마 후 저의 집으로 찾아 오셨더군요.

할머니와 인연은 10여년 전 관내 조손가정을 파악하면서 알게되었지만 자식죽고 난 후 손주와 살고있다는 것 외에도 아는 것이 없었습니다.
할머니의 방문으로 인해 속사정을 상세히 알게 되었는데, 몇시간을 토해내는 할머니의 인생, 어찌 다 적겠습니까만 대충 사연은 이렀습니다.

할머니는 집안형편이 좋지 않아 젊었을때 자식 셋딸린 홀애비집 재취로 가서 딸하나를 낳았으나 술만 마시면 이유없이 때리는 남편의 구타에 못이겨 당신이 낳은 딸하나 업고 가출하셨답니다.
여자 혼자 딸키우기가 싶지 않는 세상이였지만 딸은 배구를 잘하여 중,고등학교를 배구특기생으로 다녀서 학비도 들지 않았답니다.
그렇게 자란 딸이 결혼하여 잘 사는 줄 알았는데, 아들낳고 손주가 육개월정도 되던 날 딸은 심장마비로 죽게 되었답니다.
이 세상에 태어나서 유일한 할머니의 핏줄인 딸이 죽자 할머니는 충격에 쓰러져 미친듯이 살았는데..
1년 후, 길을 지나는데 어떤 분이 손주소식을 전하더랍니다.
아무 생각없이 찾아간 곳은 전라도 어느 시골, 한살이 막 지난 어린아이가 겨우 발걸음을 옮긴느데 한눈에 봐도 영락없는 당신의 외손주더랍니다.

때는 초가을, 제법 쌀쌀한데 아랫도리는 입지않고 티셔츠 하나 달랑 걸친 아이는 몰골이 형편없더랍니다.
한살배기 손주는 온몸에 버짐이 퍼져 차마 그냥 볼 수가 없더랍니다.
무심결에 아이 이름을 불렀더니 아이는 할머니가슴팍에 앉겨 흐느껴 울더랍니다.
딸이 죽고 미친 듯이 살았는데 어린손주를 보는 순간 정신이 들더랍니다.

딸이 남긴 손주를 안고 서울로 와서 할머니는 동사무소 공공근로와 취로사업등을 하며 열심히 살아왔답니다.
산동네 작은 셋방에서 행복하게 살았는데, 손주가 자라면서 공부방을 만들어 주고 싶어 임대아파트를 청약했더니 당첨이 되었답니다.
그런데, 현재 살고있는 곳이 재개발로 묶이면서 집주인은 보증금을 빼주지 않아 이사를 하지 못하고 결국은 친척에게 임대아파트를 세를 놓았답니다.
이제나 저제나 집주인이 보증금 빼주기를 기다렸으나 결국은 4년이 지나고..
결국은 관리처분이 떨어져 아파트로 이사를 할려고 하는데..
임대아파트는 본인이 살지않으면 자격박탈을 당하다는 규정때문에 이사를 할 수가 없답니다.
손주를 키우면서 힘들었지만 비록 임대아파트지만 손주와 단란하게 살고싶었는데..

할머니의 하소연을 듣고 며칠동안 동사무소와 임대아파트관리사무소와 아파트부녀회장 만나 구제방법이 없는지 알아보는 중에 할머니집을 찾았습니다.


할머니와 손주가 사는 집은 산동네 허름한 곳이였습니다.
2평 남짓한 작은 방문을 열자 손주의 사진이 벽면에 걸려있더군요.
손주는 어려운 환경에도 불구하고 잘자라 이제 중학교 1학년이 되었습니다.


방안은 작은 서랍장과 낡은 책상뿐이였습니다.
책상위에는 손주가 보던 책들이 정리도 되지 않은채 쌓여있더군요. 
할머니와 잠시 이야기를 나누던 중 손주이야기와 나오자 할머니는 어지럽게 뒹그는 책상 한모퉁이에서 손주가 받은 상장꾸러미를 꺼내어 저에게 상장자랑에 정신이 없습니다.
상장꾸러미에는 온갖 상장이 가득합니다.


 표창장과 독서상 그리고 장학증서까지..
잠시 이야기를 나누다가 할머니께서는 황급히 일어나시더니..
"우리 손주 학교에서 돌아 올 시간이 되었네. 요즘들어 밥도 잘먹고 수시로 먹을 것을 찾아요.. 집에 오자 말자 바부터 찾을텐데."라며 부엌으로 나가시더군요.



아파트관리사무소에 물어봤더니 할머니와 손주는 아파트로 주소는 되어있지만 임대아파트에는 다른 사람이 살고있다고 합니다.
임대아파트는 원래부터 본인이 살지 않으면 규정상 위법이라며 "여태까지 할머니사정이 딱하여 이사오기만 기다렸는데, 얼마전 본사에서 실태조사 나왔을때 세입자와 실제주인명의가 달라서 위법에 걸려서 어쩔수가 없다"고 하더군요.

할머니사정이 딱하지만 아파트관리 사무소에서는 어쩔 수가 없다고 하더군요.

다음달이면 할머니는 이사를 해야 합니다.
현재 강북은 재개발붐으로 전세값은 배로 올라 현재 보증금으로는 갈 곳이 없는 실정입니다.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서 낳은 딸은 죽었지만, 죽은 딸이 남기고 간 내 손주.. 내가 죽기전에 이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어른으로 자라는 모습보고 죽어야 하는데.."라며 "평생을 살면서 억울한 일도 많이 당했지만 그저, 내 손주와 살 수있는 방한칸이 없다니.. 그저 막막하기만 하네..."
울먹이는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