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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에 가고 싶다

남산골 한옥마을에 복원한 "부마도위 박영효가옥"




남산골 한옥마을에는 옛 정취(情趣)를 되살려 시민들에게 제공하기 위하여 골짜기를 만들고 물을 흐르게 하였으며, 정자(亭子)를 짓고, 나무를 심어 전통정원(傳統庭園)을 조성하였습니다.

남산골 한옥마을도 옛 남산 시민아파트와 안기부자리를 헐어 7,934㎡(2,400평) 대지 위에 서울의 팔대가(八大家) 중 하나였던 박영효 가옥(朴泳孝 家屋 )으로부터 일반평민의 집에 이르기까지 전통한옥(傳統韓屋) 다섯 채를 옮겨놓았는데, 그 중에서 서울 팔대가중의 하나로 전해지는 조선 제 25대 철종의 딸인 영혜옹주의 남편 박영효(1861∼1939)가 살던 집을 소개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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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문에는 봄을 알리는 입춘첩이 붙어있는 대문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안채는 ('') 자형 몸채에 'ㅡ'형 행랑간이 붙어 '' 형으로 되어 있으며, 부엌과 안방이 모두 같은 방향으로 향하고 있는 것은 개성(開城)을 중심으로 한 중부지방형(中部地方形)으로 서울의 주택에서는 보기 드문 형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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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대석(長臺石)을 사용한 기단(基壇), 칠량가(七樑架)의 가구(架構), 6칸 크기의 부엌 등에서 대가(大家)의 면모를 느낄 수 있으며, 파련각(波蓮刻)한 보아지와 파련대공(波蓮臺工)을 사용하고, 마루밑 고막이 벽에 투공문양(透孔紋樣) 벽돌을 사용하여 환기공(換氣孔)을 설치한 점 등은 일반 민가에서는 보기 드문 것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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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엍 뒷켠에는 헛간(창고)이 나오는데, 농사철에 쓰는 농기구를 정리해 두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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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곡기를 비롯하여 커다란 두지(항아리)도 보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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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엌문을 열자 뒷뜰에는 우물과 장독대가 보입니다.
잘 정리해둔 항아리가 정겹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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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어릴때 방학이면 할머니댁으로 놀러갔었는데, 손주먹을 떡 만들어 주신다고 디딜방아에 쌀을 넣고 발로 방아찍어서 쌀가루를 만드셨는데..
저는 할머니곁에서 디딜방아를 디디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한옥마을에 옮겨서 복원시켜 놓은 한옥들은 집의 규모와 살았던 사람의 신분에 걸맞는 가구(家具)들을 예스럽게 배치하여 선조들의 생활모습을 직접 보고 알 수 있게 하여 시민들에게 많은 볼거리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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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산 북쪽 기슭 한옥마을이 들어선 필동(筆洞) 지역은 조선시대에는 흐르는 계곡과 천우각이 있어서 여름철 피서를 겸한 놀이터로 시민의 안식처로 만들어 서울시민뿐만 아니라 사시사철 외국관광객도 즐겨 찾는 명소가 되었습니다.

문화재가 있는 곳은 어디든지 안심할 수가 없습니다.
숭례문이 화재로 사라진 후, 문화재관리에 비상이 걸렸습니다.
오늘 600년동안 서울 중심에서 국민의 지존심을 지켜주던 숭례문이 허무하게 사라진 날입니다.지난 가을 남산한옥마을을 찾았을때, 일본인관광객들이 한옥마을에서 담배를 피우더군요.

서울시는 시민들의 휴식공간을 마련하기 위하여 많은 돈을 투자하여 곳곳에 많은 문화재를 발굴하여 시민의 안식처를 제공해주는 것은 잘한 일입니다만, 민족의 얼이 담긴 문화재가 화염에 쌓여 허망하게 사라지는 모습을 보면서 명소를 만드는 것이 중요한게 아니고, 작은 문화재라도 소중하게 관리해 주면 얼마나 좋을까하는 마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