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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의사 순국 98주년 기념식에 참석했습니다.

아침 남산도서관부근에 있는 안중근의사 기념식에 초대받아 다녀왔습니다.
남산 안중근기념식이 열리는 의사관 앞은 차거운 바람이 불어 봄은 봄인데 꽃망울조차 꽃잎을 터트리지 못하고 꽃샘추위에 움추리고 있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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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의사 동상 앞에는 순국한 날을 기리는 꽃다발이 쓸쓸히 자리를 잡고있습니다.

1910년 3월26일 오전 10시4분 교수형이 집행되고 10시15분 감옥의는 그의 죽음을 확인한날입니다.
1879년생이니 그의 나이 31살이었습니다.
오늘은 안중근 의사가 중국 땅 여순감옥에서 생을 마감한 지 꼭 98년 되는 날입니다.
오늘의 우리가 존재하기 위해 수많은 순국선열들이 계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애국조회 할 때 마다 순국선열에 대한 묵념을 하는 이유도 잘 알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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見 利 思 義 見 危 授 命(견리사의 견위수명)이라고 안중근의사의 친필로 쓴 기념비

이익을 보거든 정의를 생각하고
위태로움을 보거든 목숨을 바쳐라.

나라의 운명은 절대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만들어나가는 것이다.

나라에대해 분개함이 없다면 이미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이 없는것이다.

안중근의사가 즐겨쓰시는 글귀가 마음에 와 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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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의사 기념전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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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의사 동상 뒷편에는 역사의 흔적을 돌에 새겨두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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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의사의 사진과 함께 유품을 전시하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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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9년 안중근의사와 관련된 열사들의 사진이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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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의사 혈맹동지의 명단이 적힌 액자도 보이네요.
가슴이 뭉쿨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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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기념식행사장에는 안중근의사유족과 함께 평소에 의사를 존경해온 일본인도 참석했더군요.
기념식장에는 각계에서 보내온 화환이 즐비합니다.


3사 군앋대의 연주가 흘러나오는 가운데 기념식에 참석한 귀빈들이
헌화를 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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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음악 어린이합창단이 태극기를 손에 들고 안중근을 기리는 노래를 부르는 모습입니다.


안중근의사를 기리는 노래 "안중근"과 "태극기"라는 노래를 부르는 모습입니다.



대한국인 안중근의사는 조국과 민족을 위해 목숨을 바친 수 많은 독립운동가 중에서도
가장 대표적인 민족정기의 순국열사입니다.
1879년 9월 2일 순흥을 본관으로 황해도 해주읍에서 출생하셨습니다.
19세에 홍석구 신부를 만나 천주교에 입문하여 "도마"라는 세례명을 얻었고
서구 문명의 신지식을 배운 분이셨습니다.

1907년 일본은 고종황제를 퇴위시키고 군대를 해산하고 철도를 빼앗았고,
경찰권을 박탈하는 등 식민지 통치를 강화하자, 안의사는 학교교육으로 "백년대계는 가능하되 당장 나라를 구할 수 없다"하고 해외망영을 결심하셨습니다.
이때 안의사의 나이 29세였습니다.

러시아땅 연해주에서 안의사는 김두성, 이범륜등과 의군을 편성하여 일본군과 두만강일대에서 십여차례 치열한 전투를 감행 혁혁한 전과를 올렸으며, 1909년 2월 안의사는 무명지를 잘라 그 선혈로 태극기를 그리고 독립투쟁을 맹세하였습니다.

안의사는 러시아 연추부근 "카리마을"에서 11명의 결사동지를 규합
"단지동맹"을 결성하였습니다.

마침내 안의사는 1909년 10월 26일 한국 참탈의 원륭 이등박문의 죄상을 밝히고
"나는 대한의 의병장으로서 한국참탈과 동양평화를 파괴한 적의 괴수를 처단할 것"이라는 했습니다.

한편 안의사는 여순옥중에서도 나라의 안위를 걱정하시어 "자서전"과 "동양평화론"을 집필하시는 동안 일제는 국제법을 무시하고 안의사를 사형집행하므로서
1910년 3월 26일 32세로 순국하셨습니다.

안의사의 육신은 비록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지만 조국과 겨레를 위한
헌신의 숭고한 정신과 "한성산패 만고정리" 즉, "합치면 이룩하고 흩어지면 패한다"고 하신 거룩한 깨우침과 불멸의 평화애호사상을 우리후손에게 남기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