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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에 가고 싶다

경복궁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 경회루.

어제 종로구 종로문화원이 마련한 종로구 문화재탐방을 다녀왔습니다.
2년전까지는 문화재탐방을 자주 다녔으나 직장을 그만 둔 후 오랜만에 여유로운 서울 궁 나들이를 다녀왔습니다.
제일 먼저 도착한 곳은 경복궁, 경복궁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 경회루를 담았습니다.
초가을로 가는 경회루는 고요한 연못에 비춰 고요하기만 합니다.

경회루는 왕실 침전영역 서쪽에 위치한 연못 안에 조성된 누각으로 외국사신의 접대나 임금과 신하 사이에 벌어지는 연회장소로 사용할 목적으로 만들어졌습니다.

경복궁 창건 당시는 작은 누각이었던 것을 태종 12년(1412)에 크게 연못을 파고 지금과 같은 규모로 만들었고 그 후 성종 때 건물이 기울어져 다시 고쳐 지었는데 돌기둥에 용과 꽃 장식을 하여 화려하게 치장하였답니다.

경복궁 안에 있는 우리나라 최대의 목조누각 경회루.
국보 제224호로 외국 사신의 접대와 연회를 베풀던 곳으로 1592년(선조 25) 한양의 백성들에 의해 전부 불타버렸다가 1865년(고종 2) 경복궁 중건공사 때 다시 짓기 시작해 1867년 완공되었고 현재의 건물은 1867년(고종 4) 다시 지은 것입니다.
오른쪽에는 왕실의 침실영역인 자경전이 보입니다.


왼쪽에는 연산군 때에는 연못 안 인공섬을 만들었다는 만세산은 소나무가 무성하여 경회루, 연못과 잘 어울려 운치를 돋구지만 연산군이 조선팔도에 있는 처녀들을 모아 경회루 만세산에서 연회를 즐겼다는 생각이 떠 올라 기분만은 유쾌하지 않습니다..

흥청망청이란, 연산군은 조선 팔도에 채홍사(採紅使),채청사(採靑使)를 파견,아름다운 처녀와 건강한 말을 뽑고 각 고을에서 미녀와 기생들을 관리하게 했다.명칭도 기생에서 운평(運平)으로 바꿨다.


또 원각사를 폐지하여 기생양성소로 개편하고,오늘날 국립대학에 해당하는 성균관도 학생들을 내쫓고 유흥장으로 만들어 버렸다.전국을 이처럼 접대부 양성소 및 대기소로 만들어 놓고 눈에 드는 운평은 대궐로 불러 들였다.

궁중에 들어가면 명칭이 흥청(興靑)으로 바뀌며 지체가 높아졌다.그러나 흥청이라고 다 같은 흥청이 아니었다.임금의 마음에 들어 잠자리를 같이 하면 천과(天科)흥청이라 하여 급수를 높였다.그렇지 못한 흥청은 반대로 지과(地科)흥청에 머물렀다.

벼슬아치나 선비들로 하여금 흥청들을 태운 가마를 메게 했으니 천지가 뒤바뀐다 해도 상상하기 어려운 일을 저질렀다.그런 식으로 밤낮을 가리지 않고 흥청들과 놀아났다.

자신이 말이 되어 흥청들을 태우고 기어다니지 않나,반대로 자기가 그녀들 등에 올라 타 말놀이를 즐겼다.그도 모자라 민간 유부녀도 이쁘다는 말만 들으면 불러다 함부로 겁탈하고,심지어 큰 아버지인 월산대군의 부인까지 성추행했다.


연못에 인공섬으로 만든 만세산은 소나무를 심고 그 곳에 월궁을 꾸며 조화를 장식하였으나, 임진왜란 때 화재로 모두 소실되
었습니다.
그 후 경회루건물은 없어졌지만, 경복궁이 중건될 때까지 연못은 나라에 가뭄이 들 때마다 
기우제를 지내는 곳으로 이용되었다고 합니다.


경회루의 역사만큼 오래된 버드나무 한그루가 눈에 띕니다.

 
경화루 호수가에 홀로 선 버드나무는 경회루의 고단한 역사를 말해 주듯이 제 몸을 꼬면서 가로 누운채 자기 몸을 지탱해주는 나무에 기댄채 꼿꼿이 자라고 있습니다.

가을 햇살에 드너난 경회루는 조선시대 왕들의 연회를 베풀던 곳으로 특히 연산군이 조성한 만세산, 여흥에 빠져 흥청망청이라는 단어가 생각납니다.
폭군이라는 연산군은 중종반정이 일어나 왕좌에서 쫓겨나고 목숨을 잃었다.
그렇게 흥청들과 놀아나다 망했다 해서 백성들간에 흥청망청이란 말이 생겨났다고 합니다.
만세산을 보고 있노라니 작은 배 한척이 외로히 떠 있어 연산군의 일생이 생각나서 인상무상이라는 말이 새삼 떠 오르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