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 아침, 봉사회 신년 첫모임이 있어 집앞에서 택시를 기다는데, 저만치서 폐지줍는 할머니는 빈수레를 끌고 언덕길로 올라 오시더니 인도와 차도 경계석에 풀썩 주러 앉으십니다.
한겨울이라 아침공기가 매우 차가운 탓에 폐지줍는 할머니는 눈만 내 놓은 채 얼굴전체를 가려 알아보지 못했는데, 가까이서 보니 매일마다 동네를 다니면서 폐지줍는 할머니셨습니다.
"할머니셨구나.. 얼굴전체를 가려서 몰라 봤어요."
"그려.. 아른아침에 어딜 가시우. 바람이 차서 조금만 걸어도 숨이 차.. 겨울이라서 춥기도 하고.."
"그럼, 천천히 나오시지 이렇게 일찍 나오셨대요."
"인제 나오는 길이야. 예전같으면 이미 한차례 실어 고물상에 팔고 왔지.."
"잘 하셨어요."라고 인사를 건네던 중 할머니께서는 얼굴전체를 가렸던 목도리를 풀어 제치더군요.
"날씨도 추운데, 목도리를 왜 풀어 제치세요."
"언덕길을 올라왔더니 숨이 차네."
"그러고 보니 할머니 얼굴안색이 좋지 않으세요. 얼굴에 부기도 있구요."
"얼마전 수술 받았어."
"녜, 어디가 편찮으셨어요."
"위에 종양이 있었나 봐.. 한동안 밥을 먹고나면 속이 거북해서 병원 갔더니 위에 혹이 있다잖아.. 종양 떼내는 수술 받았어. 수술 받느라 한동안 못 나왔지."
"어머나, 그러셨어요. 한동안 보이지 않길래 폐지 줍는 일 그만 두신 줄 알았어요. 몸도 아직 회복된 것 같지 않는데, 집에서 좀 쉬지않고.. "
"그랬으면 얼마나 좋을꼬.."하시면서 긴 한숨을 쉬더니..
"집안에 있으면 숨이 막힐 것 같아.. 답답해 죽겠어.."
"참, 영감님은 잘 지내시나요."
"진즉에 아파서 꼼짝 못하지. 하루종일 누워서 똥, 오줌도 못 가린지 오래 됐어. 하루종일 말도 못하는 영감님 옆에 앉아있으면 답답하기만 해. 그러니 어쩌겠어.. 페지라도 주어서 영감님 약값이라도 보태야제."
이야기를 나누던 중 할머니께서는 숨이 차신지 연신 긴 한숨을 내 뱉더군요.
"답답하시다니.. 이젠 아들도 자리를 잡았을텐데.. 이젠 집에서 쉬면서 아들에게 기대세요."
"그럴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꼬.. 아들자식, 자기 자식 챙기기도 벅찬데.. 내가 도와주지는 못해도 자식 신세 질 생각은 없어."
"자식 신세 지고 싶어서 지나요. 할머니께서도 년세도 만만찮을텐데.. 참 올해 몇살이세요."
"나이 알아서 뭣해.. 여든이 다 되어가제.. 해 놓은 것은 없고 나이만 먹었네."
"그만큼 하셨으면 자식들에게 신세져도 괜찮아요."
"말도 말게.. 아들도 힘든가 봐. 얼마전에는 나보고 모아놓은 돈있냐고 묻더라."
"녜엣!! 자기네들도 뭣했데요."
"우리 큰아들도 힘들어. 나이가 50이 넘었는데.. 혼자벌어 손주 뒷바라지도 벅차나 봐."
"자식 키우는 것 다른 사람도 다 해요. 할머니는 별 걱정 다 하세요."
"아니야. 얼마전까지도 장사가 괜찮았는데.. 요즘 불경기라 수입이 줄었데.. 손주녀석, 대학 둘이나 다니니 등록금 대기도 벅찬가 보더라.. 이번 수술만 하지 않았더라면 손주 대학 등록금 보태 주었을텐데.."
그렇지만 매일마다 우리동네에서 폐지를 줍는 일을 하신지 십년이 넘었습니다.
몇달전만해도 하루에 다섯차례 가득 채운 수레를 팔면 하루에 삼만원 벌리는 되었는데, 요즘은 폐지싣은 수레가 힘에 부쳐 하루 두차례정도 하는데, 하루 수입은 오천원 벌이도 힘들다며, "자식에게 보태주지는 못해도 자식에게 짐이 되기전에 죽는 것이 소원"이랍니다.
빈수레조차 작은 턱도 옮기기 힘에 부치지만, 할머니는 아픈 몸으로 폐지 주으러 나오시더군요.
외출했다가 늦은 저녁, 집으로 돌아 오다가 아침에 만난 할머니를 다시 만났습니다.
그런데, 다시 만난 할머니께서는 내가 염려했던 것보다 더 심각하더군요.
걸어 오시는 모습을 자세히 보니 할머니의 입주위는 미세한 경련으로 입을 다물지 못하고 떨고 있더군요.
여든이 되어 수술받고 회복도 되지 않는 몸으로 폐지를 주우러 나오는 할머니.
장성한 자식이 있지만 거동이 불편한 할아버지 약값이라도 벌어야 한다는 할머니..
중년이 된 자식에게 짐이 되기도 싫지만, 손주등록금 보태주지 못해 미안하다는 할머니의 모습을 보니, "어쩌면 우리어머니의 모습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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