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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에 가고 싶다

종묘는 세계 최고의 제실이다.

서울 도심에 살면서 산책정도는 했지만 정작 외국인이나 외부인이 물으면 문화재에 대한 상식이 부족합니다.
가까이 사는 내가 서울 도심문화재에 대한 상식이 부족하다는 자체가 부끄러운 일이더군요.
이번 종로구청 문화원에서 초청한 문화탐방은 전문 해설자와 동행한 자리라서 의미가 깊습니다.

문화재 해설자가 설명하는 것을 놓치지 않을려고 애를 썼건만 이제 나이를 먹었는지 금방 듣고도 돌아서면 잊어버리니..
제 나름대로 정리해서 올립니다.

경복궁을 뒤로하고 인사동에서 점심을 먹은 후 문화재탐방은 사적 제125호인 종묘로 향했습니다. 


종묘는 조선시대 역대 왕과 왕비의 신위를 봉안하여 모셔둔 곳으로 태조 이성계가 한양을 도읍으로 정한 후에 가장 먼저 세워진 건물입니다.

현재 종묘는 임진왜란때 소실되었다가 광해군때에 중건되어 어늘에 이르고 있으며 경내에는 정전, 영녕전을 비롯하여 제사에 사용하는 제수의 진찬 준비를 하던 전사청과 국와이 제사를 준비하던 어숙실과 제사 예물을 보관하고 제향에 나갈 현관들이 대기하던 향대청등 많은 사적들이 있습니다.

조선의 역대 공신 83위의 신주를 모신 공신당을 비롯하여 7신에게 제사를 지내던 칠사당등이 있습니다.
종묘일곽은 사적 제 125호, 정전은 국보 제227호, 영녕전은 보물 제821호로 지정되어있고, 종묘는 1995년 12월 독일 베를린에서 열린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 정기총회에서 정식 의결을 거쳐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고 종묘제례 및 종묘제례악은 세계무형유산으로 등록되어 우리나라의 보물중에 보물입니다.
종묘제례는 1971년 이후로는 전주이씨 대동종악원에서 매년 5월 첫째 일요일에 한차례 제를 올리고 있답니다.


종묘입구에는 유네스코에 등재된 문화재임을 알리는 표석이 먼저 눈에 띕니다.

그리고 우물이 있습니다.
아마, 조상께 제를 지내기 전, 우물에서 손을 씻고 정걀한 마음으로 종묘를 들어갔나 봅니다.

하마비도 보입니다.
종묘 하마비는 조선시대 종묘를 지나가는 사람은 신분을 고하를 가리지 않고 누구든지 존경심 표시로 말에서 내리라고 세운 비석이랍니다.
1413년(태종13년) 예조의 건의로 종묘에 이르러서는 모두 하마하도록 항식을 삼았다.
이 하마비는 1663년(현종 4년) 10월에 세운 것으로써, 전면에는 대소인원은 이 곳에 이르러서 모두 말에서 내리라고 쓰여있고 비신은 높이 132cm, 너비58cm, 두께20cm라고 적혀있습니다.


종묘안으로 들어가니 망묘루가 먼저 보입니다.
망묘루는 왕이 제향시 이 곳에 들려 정전을 바라보며 선왕을 추모하고 나라와 백성을 돌보고자 마음을 가다듬는 곳이라는 의미에서 붙어진 이름을 가진 건물이다.

이 곳은 정전, 영녕전을 비롯하여 제사에 상요하는 제수의 진찬을 준비를 하던 전사청이다.
진사청은 금녀의 곳으로 제수의 진찬은 모두 남자들이 준비했다고 합니다.

검은 돌로 만들어진 네모로 제단은 제사에 쓰일 음식을 만들어서 놓았던 찬막단이다.
제사에 쓰일 음식이 준비되면 이 곳에 놓아두고 준비가 제대로 되었는지 점검했는 것 같습니다.




정전 신위 봉안도로 정전에는 태조를 비롯하여 공덕이 있는 왕의 신주 19위, 왕비의 신주 30위로 총 49위가 모셔져 있다.

정전을 살펴보면 전전 일곽은 네모나게 담으로 둘러 싸여있다.
묘정을 중심으로 남쪽 담 중앙에는 신문, 동. 서쪽에는 제례때 제관이 출입하는 동문과 악공과 종사원이 출입하는 서문으로 각각 나 있다.
 

신문 정면 3칸, 측면에는 2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이중량을 한 5량가이고 초익공이다.
각 칸에는 두짝의 판문을 달았고 상부는 홍살로 되어있다.

정전 전면은 각 칸마다 두짝씩 판문을 달 안으로 열고 닫히도록 하였으며 중앙 칸에는 밖으로 빗장을 달았다.
문 하방 좌우에는 신방목이 있고 신방목 머리에는 삼태극이 조각되어 있다.
문 외부에는 발을 칠 수있게 되어있어 제향 때에 판문을 열고 발을 널어 뜨리고 제의를 행한단다.
내가 방문했을때 내부는 자세히 볼 수었었지만 내부는 전체를 벽체로 칸막이를 하지 않고 하나의 공간으로 되어있으며 휴퇴칸에는 각 칸마다 신주를 모신 감실을 두었다고 한다.
감실에는 신주가 서측에는 왕, 동측에는 왕비의 위치로 봉안되어있고 감실 전면에는 신탑이 있어 제향때 신주를 모시도록 하였다.

바닥은 커다란 자연석으로 되어있는데 비가 내려도 물빠짐이 좋도록 만들었고 비딕 돌에는 쇠고리가 있는데, 비가 오거나 햇볕을 피하도록 천막을 치는데 사용하는 것이다.

내가 종묘를 찾기 전 비가 내렸는데도 바닥은 물기하나 없었다.
뒷쪽 굴뚝은 제를 지내기 전 향을 피울 때 사용한다고 한다.

정전에는 양녕전으로 가는 길에 놓인 바닥돌이 비틀게 놓여져있다.
조상에게 가는 길은 바닥에 놓인 돌을 밟으면서 마음을 가다듬는다는 의미로 예전에는 더 비틀게 놓여졌는데 복원을 하면서 바르게 놓여졌다고 한다.

종묘공원에는 종묘를 지나면 서쪽에 영녕전이 있다.
영녕전은 종묘정전에서 옮겨온 신위를 모신 종묘의 별묘이다.

 서울에는 있는 지금의 종묘는 태조4년(1395) 건립되었으며 세정에 이르러 현재와 같이 정전과 영녕전이 있는 종묘건축제도를 완비되었다.
세종원년(1419)에 이르러 2대 왕인 정종이 승하하고 그이 신위를 종묘에 모실때가 되자 이미 종묘에 보셔져 있는 태조의 4대조(목조, 익조, 도조, 환조)와 태조의 신위, 그리고 정종의 신위를 어떻게 모셔야 하는 문제가 거론되게 된다.
정조의 신위를 종묘에 새로 모시게 되면 목조의 신위는 정전에 모실 수 없게 되기때문이다.
이때 논의를 거듭하여 "신주를 묻어 버린다는 것은 차마할 수 없는 일이며 또한 간직할 만 곳이 없다"고 의견을 모으고 중국 송나라에서 따로 별모인 사조전을 세워 4조를 모시는 예를 채택하여 지금의 종묘, 정전의 서쪽 바깥에 별묘를 세워 목조의 신위를 모신 곳이 영녕전이다.

 

 영녕전의 신위 봉안도이다.


영녕전은 16실로 왕의 신주 16위와 왕비의 신주 18위로 총 34위가 모셔져 있다.


 세계에서 가장 거대하는 아르테미스 신전은 크기(약 55×110m)이지만 이 신전은 고트족의 침략으로 AD 262년 파괴되어 다시는 복구되지 않아 신전의 유적은 거의 남아 있지 않지만 종묘의 제실 길이는 101m로 세계에서 남아있는 제실로는 세계에서 최고의 크기입니다.

이렇게 소중한 문화유산이 가까이 있으면서 건성으로 봤는데, 이번 문화재참방은 저에게도 유익한 문화재 탐방이였습니다.